88올림픽 자원봉사단 수기 공모전 대상(우리어머니)

하늘에는 구름이 검게 덮히고 오후 7시경 천둥을 동반한 비바람이 불어 기대에 부풀었던 마음이 갑자기 불안해 지고 내일 올림픽 개막식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 무릎을 꿇고 조용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7년 동안 온 정성을 다해 준비한 이 모든 것을 보시고 내일 맑은 날씨를 주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를 했다.


아마도 내 기억에는 나라의 큰 일에 이렇게 간절히 기도해 본 적이 별로 없었던것 같다.
이 땅의 모든 국민들도 나와 같은 기도를 했으리라.

9월 17일 드디어 더 맑고 파란 하늘과 더 푸른 강과 땅들이 마치 세계의 평화와 화합과 전진을 약속하듯 개막식은 시작되고 흥분된 가슴으로 바쁜 일손을 멈추고 텔레비젼 앞으로 모여 앉았다.

앞으로 진행되어질 행사의 순서를 기다리며 새롭게 펼쳐지는 우리 민족의 긍지와 고귀한 자태를 빠짐없이 눈에 담아 눈물겹도록 감격스런 장면에 내가 그 속에 함께 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우리 내면의 겸손함과 우아함 그리고 숨겨진 무한의 잠재력을 다소곳이 드러내며 창조를 표출하는 그 모습에 환희의 눈물이 흘렀다.

이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확신감에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이 좋은 날씨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나는 패밀리타운 객실본부 객실관리부 룸메이트로서 어느 K 여성단체에서 올 2월달 자원봉사요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회원으로 등록하여 몇 차례 교육과 면접, 신체검사, 신원조회를 거쳐 8월 16일부터 17일까지 2일간 소양 교육을 받은 후 패밀리타운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아파트 내부가 다 마무리 되기도 전에 처음 생각보다는 엄청난 중노동을 요하는 대청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세대에 다시 없을 지 모르는 인류의 대제전에 자원하여 참여하고 싶었던 욕망이 잠시 망설여짐을 부인할 수 가 없었으나 어떤 어려움도 참고 해보리라 다시 마음을 굳히고 기꺼이 일을 시작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분들은 그만두는 사람도 있었다. 평소에도 늘 소화기능이 좋지않았던 나는 피로와 더위에 지쳐 더한 고통을 당해야했다.

시작도 하기전에 어느 한 사람도 입이 부르트고 입안이 헐지않은 사람이 없었다.

개막식을 며칠 남겨 놓고 AD카드가 나왔다. 패밀리타운을 출입하는데는 철저한 보안이 필요했기에 불편을 느껴오던 터라 무척 기다렸던 것이다.

AD카드에 기록된 글짜를 하나 하나 읽어본 나는 자원 봉사라는 단어는 찾아 볼 수 없고 용역이란 두 글자에 경악하고 말았다.

모든 자원한 분들은 분노하여 떠들기 시작했다.

회장 L씨를 만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사무실 앞에 모이라는 전갈을 받고 다함께 나갔다.

아무런 회답도 없었고 그러기를 연 3일째 사태가 악화되고 있을 때 L회장이 나와 자원을 용혁으로 된 이유며 그것에 대한 잘못을 사과했으나 말을 듣지 않을 기세였다.

그 때 올림픽 운영위원의 한 간부가 나와 요구사항이 무엇인가를 물은 뒤 내일 요구대로 자원봉사자로 수정해 보겠노라고 하여 다 해산 됐다.

그 다음날 약속은 무산되고 오직 용역으로서 일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급박한 상황을 해결시키기 위한 거짓말이었다고 흥분하고들 있었다.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패밀리 타운은 관광객 유치 목적으로서 올림픽 운영이 너무 방대하여 5개 호텔로 넘겨 주어 다른 단체로 모집인원을 확보하다보니 용역 모집으로는 도저히 이 많은 인원을 확보할 수 없어 자원봉사라는 명칭을 붙여 모집을 한 것이라 했다.

아무리 여성단체라 해도 업체로서만이 이 사업을 맡을 수 밖에 없기에 사업자 등록을 내고 용역으로서 밖에는 할 수 없었다 한다.

신원조회때에도 동사무소에서 용역으로 조회 의뢰가 됐다는 것이다.

어떤 분은 서류가 잘못되어 다시 하러 가서 자원봉사자라고 했더니 아주머니가 용역이지
어찌 자원봉사자냐고 동사무소직원이 떠들어 망신만 톡톡히 당하고 왔다는 것이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용역으로 둔갑한 사실을 어찌 알았겠는가?

사람들을 속인 죄로 초췌한 모습의 L회장이 모든 이들의 아우성에 정말 보기 민망할 정도로 고통스러워 보였다.

나 또한 분노 했지만 자신이 대단치않은 존재임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며 주어진 것에 만족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기회에 용역의 일도 해 보고 내 자신을 시험도 해 보자라고 마음 먹었을 때는 L회장의 소행도 동정의 여지가 생겼다.

그러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이럭저럭 대청소는 끝나가고 아예 일당도 필요없고 약속대로 자원봉사자로 원하는 측과 어차피 고칠 수 없으니 용역도 자원으로서 참여하는 것이라며 응하는 측이 갈라져 한 동안 소요가 계속 됐다.

울며 겨자먹기로 일은 추진되고 드디어 올림픽 개막식은 시작되고 외국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 역시 자원봉사자로서 일하는 것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교회의 모든 활동도 중단한데 대한 아픔으로 한 동안 갈등에 어려움을 겪었다.

손님은 심판진, 선수가족들과 임원, 관광객이 주로 였다.

훼밀리타운에는 아르바이트 대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 이름없는 자원봉사자들인 용역이 일을 하게 됐다.

이제 어쩔 수 없이 용역의 일꾼으로 일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세계인들과 접하는 패밀리타운에서는 긴장과 생소한 것에 대한 호기심이 어우러져 약간의 흥분속에서 여러가지 배반감도 어느정도 가지고 자리를 굳혀 가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원봉사자로서 떳떳치 못한 아쉬움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민족은 주체성이 결여된 민족이라 했는가?

나는 이 세계 평화의 대제전을 통해 얼마나 우리 민족이 이 땅의 여성들이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지않고 나라를 먼저 생각하며 사랑하는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땅의 모든 국민들은 물론이거니와 여기에 참여하는 모든 여성들은 올림픽을 치르는 선진대국을 향한 국민다운 긍지와 적당한 자존심과 친절 어느것 하나도 국가를 대신하지않고 나만을 생각하는 주체성이 결여된 사람들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어찌 완벽하게 다 만점이라 할 수 있을까?

개중에는 어른이나 학생이나 사소한 불미스런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다 같이 실수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였다.

비가 조금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처음으로 외국인의 객실을 들어서려는데 사전교육은 받았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않았다.
세 사람이 일단 현관 앞에 서서 벨을 눌렀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어 문을 살며시 열어 보았다.

키가 2m 가까이 되는 미국인이 돌아서 있었다. 소리 없이 문을 닫고 다시 벨을 눌러놓고 기다렸더니 잠시 후 그 분이 나와 문을 열어주며 우리말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우리도 같이 인사를 하고 청소하러 왔다고 했더니 고맙다면서 들어오라고 했다.

그 객실에는 세 사람의 미국인이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다.

룸메이드 일은 이론적으로는 배웠지만 실제로는 무엇부터 해야할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아 서로 물어보며 한라 시간이 좀 걸렸다. 그 중 한 사람이 LS에서의 올림픽 기념뺏지를 하나씩 선물했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계속 일을 하는데 작은 우리들의 체구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그들도 우리의 인사말을 배워왔기 때문에 만나면 서로 우리말로 인사한다.

물론 처음 인사와 마지막 인사는 반드시 우리말로 하라는 교육도 받았다.

청소를 끝내고 첫 날은 아직 개막식 이전이기에 사람들이 적어 일찍이 쉴 수 있었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모두 지친 상태였다.

훼밀리 타운 객실 관리부 요원들의 필요한 인원은 약 1200명이었지만 무단 결근을 대비하여 1400여명을 확보하여 주 한번을 쉰다는 종전의 계획보다 하루 더 그 일을 쉬게 되었다.

우리가 맡은 동은 12층 건물에 56평에 방 4개, 침대 7개, 욕조, 화장실 2개, 거실 등이다.

하루 책임량은 한 사람당 7세대였다. 도저히 상상도 못 할 일거리다.

그러나 억척스럽게도 약을 사 먹고 파스를 발라가며 엄마들은 해내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내 자신도 정신없이 주어진 일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가 맡은 동은 외국 귀빈이 많이 예약되어 있었으나 예약날짜가 넘도록 많은 사람이 오지 않았다.

이유인즉 듣는 말에 의하면 일본에서 우리나라에 오려는 외국인들에게 학생들 데모하는 장면이며, 남대문 노점 음식점이며 테러 위험이며, 하는 것들을 계속 TV로 방영하고 있으며, 한국에 가면 숙소가 없어 고생한다면서 귓속말로 악선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들은 일본에 대한 흑색선전에 분노했다.

이럴 때면 왜 우리는 이 같은 것을 미리 방지할 수 없었는가 하는 마음이 절실 해진다.

그런 것 때문에 선수들도 전지훈련을 일본에서 하지 않았는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모성애적으로만 강한 엄마가 아니라 애국하는 마음 또한 얼마나 강한 여성들임을 다 같은 여성으로서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용역으로 일하게 될 때 남편과 자식들에게 마저 부끄럽다고 아우성치던 엄마들이 그 고되고 힘든 일을 어찌 다 해 낼 수 있는가 말이다.

어떤 것에든 사랑의 힘은 이처럼 위대한 것이다.

또 우리동이 다 차지 않고 46평 정도의 객실은 모두 다 들어와 일의 부담이 많을 때 우리는 지원을 나간다.

손님들은 모두 경기장이나 쇼핑이나 유원지, 제주도 등으로 떠나고 없을 때에도 며칠 일을 하다보면 짐꾸러미나 사용하는 물품들을 보아도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대강 알 수 있었다.
유럽이나 미국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온 물건이나 동전 정도는 아무데나 던져 놓는다.

완전히 개방된 사회생활의 습관이 안방에서도 이어진다.

온 방안을 가득 메운 옷가지며 가방들, 신발까지, 팬티며 양말도 침대위며 욕조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다.

욕조 화장경대 앞은 이름도 알 수 없는 향수와 화장품, 세면기구들이 정신없이 흩어져 있다.

그들은 진한 향수나 오데코롱을 많이 쓰기 때문에 그 냄새에 익숙치 못한 우리들은 코가 따갑다 못해 쓰리다.

어느날 나는 아주 예의 바르고 점잖은 노 부부를 만났다. 그 은유함과 인품은 우리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연신 고마와하며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내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미국 켈리포니아에서 왔다기에 우리 친구도 일리노이주에 산다니까 켈리포니아와는 거리가 멀다고 했다.

할머니가 쇼파에 누워 할아버지께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니 할아버지가 나에게 와서 물어보았다. 나는 아주 짧게 조금한다고 하니 좀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못내 아쉬워 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도 좀 많은 영어공부를 했더라면 이 자상한 노인들과 함께 긴 이야기를 나누어 볼 것을 후회스러웠다.

훼밀리타운에 제일 많이 들어온 나라사람들은 역시 가까운 일본 단체관광객이었다. 그들은 서구 사람들이 탁자와 쇼파위에도 카메라를 던져 놓는 것에 비하면 자기 물건들은 잘 정돈 해 놓고 별로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청소를 거부하고 그들의 마음은 알 수 없으나 끝으로는 모든것을 깨끗히 처신한다. 그들이 퇴숙하고 나면 모든 물품은 새로 교체해야한다.

다음 들어올 사람들을 위해서다.

어떤 사람은 물품을 일부 가지고 가기도 한다.

대개 일회용이므로 비싼 것은 없으나 예쁜 것은 가지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나 늘 우리는 웃음으로 여유있고 너그럽게 그들을 대한다.

그들을 이해하고 따뜻이 애하는 것은 손님들을 더 대접하는 우리의 아름다운 풍습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우리민족에게 부여한 하느님께서 주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신 사랑의 은총을 실천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튼 이제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잘 감당하여 그 영광을 그 분께 돌릴 줄 아는 사람들임을 다시금 확인하며 성공의 잔치 자리에 갈 수 없는 어느 사업자의 고용인들로서 그 영광의 깃발을 바라보며 우리끼리 히망찬 축배의 잔을 든다.

이제 나는 의무를 다 하고 내 본래의 위치로 우리 하느님과 많은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래서 내 소리없는 미소로 평화와 화합과 전진의 대열에서 새로운 연출자가 되려한다.

1988년 10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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